후삼국 시대와 고려의 통일 과정
- 900년 : 후백제 건국 (견훤) // 후 고구려 건국 (궁예)
- 911년 : 나주 공략 (왕건)
- 918년 : 고려 건국 (왕건)
- 926년 : 발해 멸망 (거란에 의해서)
- 927년 : 견훤의 신라 침입 // 공산 전투 (견훤 승리)
- 930년 : 고창 전투 (왕건 승리)
- 934년 : 운주 전투 (왕건 승리)
- 935년 : 신라 멸망 // 견훤 투항 (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견훤, 왕건에게 귀부)
- 936년 : 일리천 전투 // 황산 전투 → 고려의 민족 통일
제1대 태조 왕건 (918년~943년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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연호 : 천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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취민 유도책 - 조세율을 1/10로 낮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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흑창 설치 (흑창 : 춘대추납을 통한 빈민 구휼 기관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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결혼 정책 (호족층을 포섭하기 위해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음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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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성 정책 (사성 : 귀순한 호족들이나 공신들에게 왕 씨 또는 다른 성을 하사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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역분전역 분전 지급 (통일 과정에서 협력한 호족 2천여 명을 개국공신으로 임명, 공신들의 역할과 인품을 고려하여 역 분전이라는 토지 지급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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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심관 제도
- 중앙의 고위 관리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
-사심관으로 임명된 고관은 해당 지역의 행정과 치안 문제가 발생시 연대 책임을 짐
- 조선 건국 후 유향소와 경재소로 명맥이 이어지면서 분화 발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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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인 제도
- 지방 호족과 향리의 자제를 뽑아 수도 개경에 두고 해당 지역 업무를 자문하게 하는 제도
- 일종의 인질 성격을 띠고 있으며, 통일 신라 상수리 제도에 기원을 두고 발전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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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려 국호 사용 (고구려를 계승함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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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북진 정책의 기지로 활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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중앙 정부와 별개의 독립적인 행정 기구들을 서경에 설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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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136년 서경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이 진압되면서 서경에 설치된 대부분의 관서가 폐지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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북쪽으로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국경선 확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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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규정하고 적대 정책을 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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만부교 사건 : 거란이 고려와 친선 관계를 맺기 위해 낙타 50마리를 선물하였는데, 태조 왕건이 거란 사신들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, 낙타를 개경 만부교 다리 아래에 묶어 굶겨 죽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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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사건으로 인해 거란과 관계가 끊어지고, 이후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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연등회와 팔관회를 매우 중시하여 성대히 거행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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국가를 정신적으로 이끌수 있는 최고 승려를 뽑아 국사, 왕사로 책봉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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풍수지리설 중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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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10가지 정책 방향 - 훈요십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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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 - <정계>, <계백료서>
제2대 혜종 (943년~945년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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태조 왕건과 장화 왕후 오 씨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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태조 왕건의 결혼 정책으로 인해 제2대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다른 왕자들의 위협을 받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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945년 호족인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 원군을 왕으로 삼고자 난을 일으켰고, 진압하는 과정에서 병사
제3대 정종 (945년~949년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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태조 왕건의 둘쨰 아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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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경 지역을 세력으로 하는 왕식렴이 왕규의 난을 진압한 후에 왕식렴의 도움으로 즉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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개국 공신들과 개경 귀족들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서경 천도 추진을 시도하였으나 병사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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불법을 배우는 승려들을 위해, 일종의 장학 재단인 광학보 설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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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30만의 광군을 조직, 지휘 기구인 광군사 설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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광군은 이후 제8대 현종 때 지방을 지키는 주현군 휘하의 일품군으로 개편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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